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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니면 1의 세계

 

2017 플랫폼 크리틱 위클리 장서영 작가론

최희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블랙, 홀, 바디와 블랙홀바디

처음 장서영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흰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드는 검은색이었다. 그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검은색은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연주자가 격식을 갖춰 입은 연미복의 검정이나 장례식장에서 대기 중인 운구용 세단의 그것과 같이, 세련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죽음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색으로서 떠올린 첫인상과 같이 영상을 주로 사용하는 장서영의 작업은 장면과 장면, 텍스트와 사운드, 작업이 제시되는 환경 등을 바탕으로 보는 사람이 총체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신작 <Circle>(2017)을 보면 화면은 양분되어 데칼코마니와 같은 대칭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카메라는 나선형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고 있는 어떤 인물의 모습을 쫓는다. 나선의 계단은 대칭을 통해 얼핏 사람의 갈비뼈나 구불구불한 내장의 형태를 유추하게 하고, 계단을 따라 회전하며 내려가는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수챗구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이때 겹쳐지는 자막에서 ‘종말’, ‘끝’, ‘나선’ 등의 단어가 등장하고 영상은 회오리 감자를 먹는 이미지를 교차 편집한다.

 

주변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나선과 관련된 이미지를 수집한 슬라이드와 흑경, 거울과 암막 등이 등장하여 뒷받침 문장이 되는데, 이러한 작품들 사이의 관계는 《블랙홀바디》라고 통칭된 전시 전체를 개별 작품과 연결시켜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면서 전달하는 공허감, 병원의 차가운 이미지들이 풍기는 질병과 죽음의 뉘앙스, 하염없이 허약한 몸짓을 취하는 인물 등을 통해 장서영은 ‘간접적으로 정확하게 제시하기’라는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해내며 작업에 처연한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다.

 

 

로딩 중인 신체

한편 장서영은 두 가지 지점에서 신체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사용한다. 첫 번째는 신체의 내부와 외부를 각각 장기와 사지로 상징하면서 병든 장기의 상태를 사지가 불편한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작업에서 신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재활훈련과 같은 제스처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양자의 전제가 되는 것은 신체의 불완전함이며 그것을 극복하려 함으로써 작품 속 신체를 로딩(loading) 중인 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름 없는 병>(2016)에서 맨발의 단독자는 발끝으로 적당한 리듬을 만들며 발을 구르고 있다. 분리된 것인지 이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위쪽 모니터에는 머리 위로 돋아났거나 잡아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물이 연결되어 있고,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는 아슬아슬한 상태는 영상이 루핑(looping) 됨으로써 무한히 이어진다. 신체의 속박은 영상의 전원이 꺼지기 전까지 계속되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발끝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무용수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제한된 상황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의 이미지는 초기작인 <걸음마>(2008)부터 근작인 <Until Your Name Is Called>(2017)까지 장서영이 꾸준히 사용하고 있는 모티브이다. <걸음마>에서 작가는 마치 태엽을 감아둔 오르골의 인형처럼 또는 누군가를 대신해 벌을 받는 희생자의 모습과 같이 구속복을 착용한 무용수를 작업 안으로 불러들인다. 아마도 무용수에게 구속의 상황은 마치 이름 모를 병처럼 시작된 원인과 벗어날 방법을 알 수 없고, 내버려 둘 수 없기에 최소한의 발버둥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Until Your Name Is Called>에서 작가는 흔히 영상이 로딩 될 때 볼 수 있는 회전하는 동그라미의 형태를 무용수의 이미지와 병치시킨다. 이것은 <Circle>에서 작가가 어떤 상황의 시작과 끝 사이의 순간을 늘어뜨려 소재들을 감각적으로 연결하는 것과 닮아있다. ‘신체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마주한 종착점이 다시 신체의 표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이렇게 장서영의 작업 속에서 거듭 등장하는데, 이것은 마치 가위에 눌렸을 때 몸을 깨워내기 위해 하릴없이 허공에 던지는 몸짓과 비슷하지 않을까.

 

 

0 아니면 1의 세계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장서영의 작업에는 공통적으로 병듦, 불안, 공허 등의 정서가 녹아있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블랙 유머와 받아들이지 못할 때 파생되는 불안함이 몸짓으로써 혼재하고 있다. 한편 작가는 십진법의 세상을 0과 1의 납작한 세계로 만들기 위해 양극으로 상황을 이끌어나간다. 예를들어 작가에게 죽음이란 사전적 의미의 죽음과 사람들에게 잊히는 망각으로서의 죽음의 의미를 지니는데, 반복적 몸짓은 이 두 가지를 효율적으로 극복할 수 있기에 작가가 선택한 수행의 방법으로 보인다.

 

작업 중 그의 블랙 유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영원히 반복해서 익사하는 곰 이야기>(2013)는 빙하가 녹아서 익사하는 북극곰의 비극적인 역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익사의 감각적 공포는 자신의 죽음을 발랄하게 설명하는 북극곰의 말투와 과장된 몸짓, 극 속의 반복되는 죽음으로 희석된다. 이 과정에서 ‘빙하가 녹는다’는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전에 익사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익사한다’는 카르마적인 것으로 탈바꿈된다.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어나가는 오래된 주문을 외우듯이 장서영의 작업은 마치 ‘끝난다. 끝나지 않는다.’를 끊임없이 되뇌는 과정과 같다. 이러한 반복이 가리키는 점에 대해 요약하자면 ‘사건의 시효가 없음’, ‘생각의 공백이 없음’, ‘주체를 찾아가려는 물리적인 노력’, ‘잊혀지는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것’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복에 수반되는 무료함에도 불구하고 이 읊조림들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일순 그것이 마치 기도문처럼 절박하게 들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장서영은 발끝으로 걸어 더디고 고통스럽더라도 계속해서 자신이 설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북극곰의 익사를 멈추게 하는 방법, 무용수가 구속복을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상황을 유지시킴으로써 어떤 시작과 끝의 사이를 들여다보려 한다. 이처럼 장서영의 작업은 공허함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받아들이려는 무기력이 뒤섞여 일종의 역설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이것이 단순히 그의 작업이 죽음이나 종말을 말한다고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작품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희승(Choi Heeseung)

최희승은 홍익대학교 조소과와 동대학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예술학 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5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며 다수의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