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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구멍들

 오세원_씨알콜렉티브 디렉터(OH Sewon_Director of CR Collective)

 

발레복을 차려 입은 소녀가 서있다. 한껏 손을 올려 공중자세를 하려는 순간, 움직임에 버퍼링buffering이 걸리고 제자리. 회전하며 이동하려는 순간, 버퍼링 되면서 다시 제자리. 미완료 움직임이 반복된다. <Until your name is called> (2017)

다음 동작으로 나아가려 하나 몸 내부에서 무언가가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해 주저앉게 되는 느낌이다. 작가는 이를 블랙홀바디black hole body라 칭한다. 사전상 의미로 블랙홀은 중력이 너무 커서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천체를 말하는데, 여기서 발레리나의 몸은 블랙홀처럼 어떠한 유출 없이 끌어당기기만 한다. 한편 흡입구가 있으면 방출구가 필요하듯 블랙홀 반대편에 위치해 내뿜기만 하는 세계를 ‘화이트홀white hole’이라 하며, 이 둘은 전혀 다른 두 세계로 구분된다. 하지만 화이트홀은 아직 증명된 세계는 아니다. 결국 장서영의 블랙홀바디도 출구가 증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개’의 매개 사이의 충돌을 완화하는 장치인 버퍼링에 의해서 블랙홀 ‘하나만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화이트홀인 출구가 증명된다. 화이트홀은 블랙홀바디의 반대편, 즉 영상매체로 증명되며 출구에 대한 강박은 예술로 향유된다.

영상 속 소녀의 몸은 다음 데이터로의 원활한 이동이 불가능하다. 이때 관객은 네트워크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감지하며 버퍼링 증후군 증상과도 같은 불안감 또는 조급증을 느낄지 모른다. 설치영상 <Until your name is called>에서 발레리나의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춤은 기대하기 어렵고 우아한 움직임에 대한 기대는 즉시 배반당한다. 장서영이 개입하여 조작한 상황은 전형적 기대를 위반하며 낯설거나 불안한 페이즈phase로 전이된다. 예상치 못한 전개와 강박적 정서를 드러내는 버퍼링, 반복되는 동작과 사운드기능, 그리고 스크린과 흑경(黑鏡)의 조각적 활용은 기술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미세한 차이를 발생시켜 몰입감을 획득한다.

장서영의 이전 무채색영상들에서도 재치 있는 매체활용, 특히 루프loop와 리셋reset, 싱크로synchro, 그리고 텍스트text 활용이 돋보인다. <영원히 반복해서 익사하는 곰 이야기>(2013)에서는 배우가 퍼포먼스를 제대로 이행해야 하는 규칙을 위반하면 “상징적인 죽음”인 처음으로 리셋 된다. 작가는 관객의 몰입시간이 다른 것에 착안하여 어느 시점에서 보기 시작해도 전체가 이해되도록, 특정 룰rule에 의해 이야기가 리셋 되어 반복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북극곰 탈을 쓴 배우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북극곰의 반복되는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곰은 매번 익사하여 죽을 것이라는 슬픈 예정론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약간의 과장된 몸짓으로 전생에 곰이 어떻게 익사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다 배우는 퍼포먼스가 틀렸음을 알리는 삐소리beep와 함께 이야기를 멈추고 병풍 뒤로 들어간다. 이것은 배우와 작가가 약속한 진행법칙이다. 그리고 배우는 다시 병풍에서 나오면서 슬픈 얘기를 시작한다. 첫 번째 죽음은 북극곰이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지 못해 익사해 죽었다고 설명한다. 방주 안에 탈 수 있는 동물의 선택지는 젊고, 건강하고, 귀엽고, 모범적인 것이었는데, 비록 곰 스스로는 자신이 젊고, 귀엽고, 모범적이라고 생각되어도 선택되지 못했다. 두 번째는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서 바다에 빠져 익사한 북극곰이었고, 세 번째가 성장하면서 엄마, 사육사, 관객에게 더 이상 사랑 받지 못한 동물원 속 북극곰으로 우울증에 걸려서 우리 안 연못에 빠져 죽었다. 세대를 지속시키는 번식능력, 그리고 윤리적 순종에 의해 유지되는 권력경험에 대한 비판과 반복되는 삶, 죽음을 상정하고 사는 인간의 삶을 배우의 역할극과 곰의 이해 불가한 반복적 죽음에 빗대어 시니컬한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서로 싱크로 된 두 개의 영상 <완전한 인간>(2014)에서는 독일인 퍼포머가 한국인 작가 장서영을 대신하여 배우를 지도하는 예술가를 연기하고, 동시에 장서영을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한다. 퍼포먼스 리허설 장면, “영상 속의 배우는 예술가의 연기를 연습하며, 예술가는 자신을 연기하게 될 배우를 지도한다. 한 쪽 영상에는 예술가의 연기를 연습하는 배우가, 다른 쪽 영상에는 배우를 지도하는 예술가가 등장하는데, 이 두 역할은 한 배우가 맡아서 연기한다.(작가 작업노트에서).” 장서영은 ‘장서영 되기’라는 문제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윤리적 역할기대에 대한 모호성을 드러낸다. 또한 흰옷을 입은 한 여인에 대한 두 역할극에서 검은 옷을 벗어 건네주고, 받아 입는 행위에 의해 다른 역할수행이 부여되지만 동일한 인물임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연결고리를 통해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의 실체가 지표와 주어진 역할에 의해 변화됨을, 그리고 완전한 인간되기의 모호함을, 그리고 창조의 모호함을 보여준다. “영상 내에서 개인의 역할, 개인의 정체성은 용해되어 쉽게 대체 가능한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한 인간을 완전히 인간답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작품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이 다루어진다.(작가 작업노트에서)”

또한 <이름없는 병>(2016)은 2채널 영상설치로 심화된 불안과 기이함을 보여준다. 까치발의 여인은 검은 원뿔 모양 천에 매달려 의미 없이 원을 그리면서 반복적으로 돌고 있다. <Until your name is called>에서의 발레하는 소녀처럼, 까치발로 빙빙 도는 여인은 모두 미완료,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하며 가장 무목적의 비생산적 노동을 감행한다. 가려진 얼굴, 무명씨의 이러한 움직임을 보는 관객은 불안하고 답답하며 기이하다. 왜냐면 천장에 고정되어 길게 쭉 늘어난 그물에 잡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여인은 어떠한 불편함이나 반항의 기운을 드러내지 않고 기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를 오도 가도 못하게 붙잡고 있는 중력이 그래픽 애니메이션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지표들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타자화된 여인의 굴레,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순환과정에서 읽히는 삶과 죽음, 그리고 가려진 얼굴로 정체성이 거세되었다는 지점 등일 것이다. 이와 같이 작가의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상황이 연출된 영상들은 일반성을 상실하면서 특이한 정서를 드러낸다.

싱글채널영상 프로젝션인 <블랙홀바디>(2016)는 “육체로부터 탈출하는 ‘나’의 이야기다. 텍스트가 써지고 지워지면서 병든 몸에 갇힌 ‘나’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영상 안에서 육체는 입고 벗을 수 있는 의상으로 표현된다. 이 의상들은 ‘나’를 구속함과 동시에 특정 모양의 행위를 유도한다.(작가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호명되지 않은 타자, 조직화된 권력으로부터 낙오된, 재통제된 의식을 제거해야 한다. 전시장은 하얀 수술실과 같다. 방 속의 몸은 삶과 죽음의 경계, 규율과 비규율, 제도와 비제도의 모호한 경계에서 양극 사이를 무한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이 죽음을 반복해야 했듯이, 퍼포머의 오류는 ‘리셋’이라는 반복코드로 진입하게 한다.   

이렇게 이전 작업에서 그녀의 재기는 “지표(index)나 흔적으로서만 가시화되는 존재에 대한 관심(김정현의 ‘빛의 피부를 만지는 일’중에서)”에서 나온다. 이런 실체가 모호한 존재에 대해, 흰색의 납작한 원형으로 얼굴을 가림 처리하여 익명성을 드러낸다던지, 흰 공이 공간을 가득 채운, 또는 창문에 살짝 끼어 있는 상황 연출로 공간을 채운 어떤 익명적 실체가 존재함을 드러낸다. <납작한 세계의 구체>(2016)에서 “목적 없음, 원하는 대상 없음의 상태는 원형의 공백으로 표현되어 주인공의 머리를 대체한다... 현실은 매체화된 현실과 혼합된다. 영상 안에서 납작한 원형으로 표현되는 공허의 정서는, 실제 현실에서는 양감을 가진 구체로 제시된다(작가노트에서).” 평평한 영상매체를 통해 보는 비평면의 세계는 인식의 사각지대, 구멍을 생성한다. 이전작품이 매체와 텍스트 간 빈틈공간에 대해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 존재가 가시화되지 않는 병으로 진화하면서 중층적으로 소외된 “병명 없는 병,” “증상만 있는 정상인”에 대한 제도적 구멍, 소외를 드러내는데 이야기가 집중된다.

이번 전시에서 장서영은 신체의 개별성singularity에 주목한다. 최근 몇 년간 작가는 진단되지 않는 일련의 이상 증상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고통은 느끼나 진단명을 받지 못한 그녀의 몸은 소위 보편성universality을 상실하였다. 싱글채널 영상설치인 <Keep Calm and Wait>(2017)에서는 “당신의 이름이 호명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기다리라... 명단에 이름이 올라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라”라는 제언명령이 반복된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순히 따르거나 반발하거나, 또는 무시할지 모른다. 작가는 수긍도, 거부도, 외면도 못하는, 그리고 개별화, 대상화, 주체화도 힘든 몸의 특이성에 대해, 그리고 예술의 특이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있다.

몸이란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인칭적/비인칭적, 또는 소타자를 마주하게 되는 장소이고, 권력의 조직화로 인한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의학이나 정신분석학, 과학기술의 발전이 몸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세련되고 복잡해졌으며, 예술이 상상하는 몸을 생산했다지만, 아직 정상으로 증명되지 못한 몸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자리한다. 이러한 몸은 사회에 유용하지 못하고 경제성을 상실하여 소외된다. 그리고 이 사각지대가 생산한 구멍은 심지어 노동에 쓸모 없고, 사회를 위협하는 조직화된 광인의 경험에도 속하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로 불안의 여지를 남긴다. 여전히 이성/비이성 담론에서 진화된 제도와 권력의 구멍 속에서 중층으로 소외된 타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장서영의 신체는 몸에 대한 근대적 권력의 경제성을 진화시킨다. 그녀의 비정상적 정상의 몸은 비제도화라는 모호한 경계에 위치함으로써 중층적 고충을 겪게 된다. 제도 사각지대에 위치하는 경험은 몸에 대한 지나친 집착, 불안, 강박 같은 감정을 유발시킬 뿐아니라, 이에 대한 수긍, 거부, 외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스스로의 감옥에 갇힌다. 추방당하지도, 어떠한 형벌이 가해지지도, 광인으로 조직되어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되지도 않지만 정상인에게로부터 낯선 타자를 몸 안에서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 특이성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몸은 특이성이라기보다, 정확하게는 개별성만이 있을 뿐이다. 권력이 된, 확률이라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문의학적 지식은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병증만 있는 정상인을, 심지어 이성적 인간을 복지의 사각지대로 몰아넣는다. 몸은 또 다른 불안의식과 열등감을 내면화하고 블랙홀바디 안으로 빠져든다. 작가는 스스로 이 낯선 타자를 새하얀 수술실 앞에 놓았다. 몸의 불연속적인 통증과 적응과정에 의해 조작된 의식들은 제거해야만 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몸의 특이성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이름없는 병’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특히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병풍과 같은 가림막 구조물은 이번 전시에서 전면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소위 환자개개인을 격리시키는 수술실의 가림막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시화된 상징체이다. 제사상 뒤에 죽은 영혼이 숨어 있다가 제사상의 음식과 술로 배도 채우고 술도 한잔하고 가는 모호한 경계를 상징하는 오브제이다. 병풍과 가림막이라는 불연속적이고 모호한 구조에 숨어 있다가 등장하는,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탐닉한다.

<Circle>(2017)에서 작가는 관객을 강박의 시공간으로 초대한다. 종말론, 죽음, 끝과 같은 출구에 대한 강박은 역설적으로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반복되는 동작과 사운드, 원형, 구, 그리고 루프 되는 영상으로 환유된다. 이것은 모호한 시공간 차원에 끊임없이 미끄러져 알 수 없는 언어와 가시/비가시적 존재, 특히 제어 불가능한 몸으로부터 분리, 벗어날 출구 없음에 대한 강박이다. 끝없는 원형계단을 돌아내려오고, 소용돌이 모양 감자튀김을 돌려가며 먹으며, 모호한 시공간으로 루프 되는 영상을 통해 작가는 끝과 죽음을 상정하여 달려가는, 사각지대에 위치한 강박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려는, 결국 ‘나’에 대한 심오한 질문과 함께 출구를 찾아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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