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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피부를 만지는 일 (Touching the Skin of Light)

김정현, 미술비평가

내장 픽션

예술작품의 ‘신체성’이란 어떤 것일까? 장서영의 <상자>(2011)와 <상자 안에서>(2011)는 마치 ‘비디오’의 신체성에 관한 한 가지 답변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편의 초기작으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장서영의 작업이 전개된 양상을 들여다보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 혹은 현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눈에 띈다. 그리고 영상이라는 매체의 비물질적 성질은 이런 주제와 잘 어울린다.

 

지표(index)나 흔적으로서만 가시화되는 존재에 관한 장서영의 관심은 여러 작업에 나타난다. 짝을 이루는 두 편의 영상 <상자>와 <상자 안에서>는 한겨울 제주도의 외진 과수원 기슭에서 간이 구조물에서 추위를 피하다 사망한 노숙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다. 정상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지워진 어느 노숙자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눈길을 끌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죽은 자의 존재는 오직 시체를 먼저 수습하고 남은 ‘상자’의 이미지로만 전해진다. 죽음을 계기로 알려지는 삶이라는 서사의 구조는 <이걸 들을 때 쯤 나는 없을 거예요>(2014)에서 반복된다. 어두운 건물 복도와 층계를 거닐며 ‘이걸 들을 때 쯤 나는 없을 거예요’ 하고 내뱉고 빵 조각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퍼포머를 손전등 조명만이 어슴푸레 비춘다. 이 대사는 자살한 청소년들이 남긴 유서에게 가장 빈번하게 발견되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이미 ‘없어진’ 삶은 유언이라는 흔적을 통해서 새삼스러울 만큼 새롭게 환기되고는 한다.

 

<아주 중요한 내장을 위한 기념비>(2014)에서는 질병(대상)과 통증(지표)의 관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내장과 바깥의 역전을 시도한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의사는 병이 없다고 진단하고, 이에 맞서 환자는 ‘양말을 뒤집듯’ 안팎을 바꾸기로 한다. 내장을 바깥으로, 머리카락과 피부를 안으로. 그러나 뒤집힌 양말이 허공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흑백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변사의 이야기는 곧바로 뒤집어진다. 바깥에는 머리카락과 피부만, 안쪽에는 내장과 더불어 모든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말실수(또는 기준 시점의 갑작스런 변화)의 고의성을 확인하는 것보다 좀 더 흥미로운 건 이런 전환을 통해 벌어진 사태를 목도하는 일일 테다. ‘뒤집기’로 말려들어간 건 머리카락과 피부가 아니라 모든 세계였다는 점. 이때, 뒤집는 신체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영상 매체라고 본다면 어떨까.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영상에 대한 통상적 생각은 <납작한 세계의 구체>(2016)에서 바뀌게 된다. 덕수궁 출입제한구역의 풍경을 로드뷰로 감상할 수 있게 한 이 작업에서 영상은 다시보기가 아니라 첫인상을 제공한다. 평생 원본을 볼 수 없고 가상만을 접할 수 있을 때, 세계의 모든 것은 이미 영상 안에 있다.  

 

지표 기호는 대상과의 ‘접촉’을 전제로 한다. ‘노숙자-상자’, ‘자살청소년-유언’, ‘질병-통증’은 대상과의 신체적 접촉을 매개로 하는 쌍으로, 영상이나 사진 기록 장치를 매개로 한 ‘출입제한구역-로드뷰’의 경우와 차이가 있지만, 장서영의 작업에서는 전자 역시 다시 한 번 영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서 네 가지를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납작한 세계의 구체>(2016)에서 영상은 내부를 가상적으로 탐사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가상을 세계의 유일한 원본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영상을 세계의 지표로서 다루는 장서영의 작업을 일종의 ‘내장 픽션’이라 부르면 어떨까.

 

말 하는 상자

 

다시 상자 연작으로 돌아가서, 죽은 노숙자의 일화를 소재로 한 이 작업들은 영상이라는 납작한 상자를 빌어 발화한다. 그 중 <상자>는 일종의 대본이나 자막 영상으로, 리드미컬한 멜로디의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글이 타이핑되었다 삭제되었다 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어둡고 공허한>(2014)과 <Keep Calm and Wait>(2017)도 각각 맥락과 수법은 다르지만 장서영의 글 영상 작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 <상자 안에서>는 묘한 낭독 영상으로, 의미 불명이 될 만큼 순서가 뒤죽박죽 된 파편적인 단어나 구절을 퍼포머가 감정이입할 겨를 없이 기계적으로 읽어내고, 이를 촬영한 후 편집 과정에서 퍼즐 맞추기 하여 온전한 글로 재구성한다.

 

상자 연작 두 편은 각기 다른 발화 방식을 보여준다. 장서영은 여러 작업에서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는데, <상자>에서도 그렇다. 노숙자 사망 사건에 관한 언론 보도는 초단편 소설이나 모놀로그 시나리오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나리오의 운명이 그렇듯, 자족적인 동시에 상연이나 상영을 요구한다. 여기서 글 영상 <상자>는 낭독 영상 <상자 안에서>에 비해 시나리오의 자족성을 강조한다. 배우의 현전 및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없이도, 시나리오는 몇 가지 장치만으로도 재생될 수 있다. 가령 <상자>에서는 경쾌하고 빠른 음악이 비극적인 내용과 충돌하며 극적 긴장을 조성한다. 작가는 글이 쉽게 쓰이고 사라지는 모습을 통해 사건과 개인이 쉽게 망각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하지만, 타이핑의 조석 간만은 배경 음악과 결합하여 소리 없는 낭독 극을 연출하는 데 좀 더 기여하는 듯하다. 손쉬운 망각의 문제는 오히려 <상자 안에서>에서 발견된다. 촘촘하게 분절된 대본을 읽는 퍼포머는 내용의 인지불능은 물론 몰입의 차단 결과, 사건을 기억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 현대의 망각은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인식 및 반성 능력의 부재에서 오는 게 아니던가.  

 

장서영의 작업에서는 대부분의 발화가 변사의 낭독이나 나레이션, 자막으로 이루어지지만, <완전한 인간>(2014)에서는 예외적으로 역할극이 벌어진다. 퍼포머는 1인 2역으로 예술가(장서영 역)와 배우 연기를 소화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연기’ 개념의 도입이 자아의 ‘분열’과 결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분열은 첫째, 작가 본인과 작가의 페르소나인 퍼포머로, 둘째, 2채널 영상으로 복제된 퍼포머의 1인 2역으로 일어난다. 이런 분열-연기를 통해 제시되는 것은 빈틈없이 봉합된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주체의 분열적 감각이다. 영상을 매개로 한 주체의 자기 인식은 시차가 있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시차는 점점 커질 테고 말이다.

 

정체성의 혼잡(혼란이 아니라)에 관한 탐구는 <Lea는 누구인가?>(2015)에서 극대화된다. 레아라는 인물을 암시하는 사진, 글, 영상을 함께 제시하는 이 작업은 개념미술의 전범이 된 조셉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1965)의 전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실물 대상을 영상 퍼포먼스로 대체하는데, 실은 이 영상만으로도 대상과 언어의 개념적 분열이나 불일치를 지시하기 때문에 사진과 글은 장식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이러한 ‘장식성’은 이 작업의 잉여적 요소라기보다 주제에 가까워 보인다. 액자 구조를 이루는 이 영상의 주인공은 전시 도슨트로서 영상 설치 작업과 영상 속의 인물에 관해 설명한다. 도슨트라는 설정으로 인해 Lea의 정체성에 대한 수수께끼는 예술작품의 감상에 관한 수수께끼로 겹쳐진다. 설명하는 언어가 복잡해질수록, 즉 언어의 장식이 증대할수록 수수께끼는 복잡해진다. 이렇게 한 인물의 실체를 추적해나가는 드라마의 외피를 두른 이 작업은 예술작품의 전시에 관한 알레고리가 된다.

      

움직이는 조각

 

현전으로부터 (일단) 빗겨선 영상 매체를 주로 이용하여, 실제와 가상 간의 미로 게임을 만들며 유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는 의외로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려 했다고 밝힌다. 실체 없음으로서의 가상은 어떻게 현전으로 회귀하고 있을까.

 

사실, 영상의 비물질적 성질과 조각적 현현의 역설적 공존에 대한 인식은 드물지 않다. 영상의 공간적 기원을 먼저 영화관에서 찾은 후 미술관의 시간적, 공간적 체험 방식을 고민하는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역설을 추구해왔다. 영상-조각의 대략적인 등장 배경은 첫째, 영상 작업의 건축적 설치에 대한 고민과 둘째, 전시 관객의 정신 분산적 감상 방식에 대한 대응에 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전자는 다양한 스크린 건축술로부터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된 설치 미술로의 확장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거의 변화가 없거나 반복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단조로운 쇼트나 시퀀스를 추구하는 방향성을 낳았다.

 

장서영이 영상에 조각적 성질을 부여하는 이유와 방법은 무엇일까. 러닝타임 내내 퍼포머를 바스트샷으로 고정한 <상자 안에서>나 단일 오브제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제시하는 <아주 중요한 내장을 위한 기념비>는 후자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보다 특수한 방법은 <나를 잊지 마세요>(2013)와 <납작한 세계의 구체>(20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영상 빛에 다시 빛 쪼이기. <나를 잊지 마세요>는 슬라이드 재생되는 언론 보도 사진 위에 손전등을 밝혀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이 지워지도록 한다. <납작한 세계의 구체>에서도 인물의 머리가 지워지는데, 이번에는 백색 원형으로 평면적 이미지를 오려낸다. 이와 같이 영상의 ‘뚫린’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물리적 실체가 없는 영상의 이미지를 오히려 3차원으로 의식하게 만든다. 이 중 <납작한 세계의 구체>는 영상과 함께 대형 백색 풍선을 설치하여 2차원의 영상 속 뚫린 공간이 3차원으로 삐져나온 효과를 연출한다. 2차원의 영상이 3차원의 공간을 뚫고 나왔다고 할 수 있을까. 백색 풍선이 다시 등장하는 <블랙홀바디>(2016)는 실제와 가상의 전치에 관해 보다 직접적으로 선언한다. “그러니까 내가 내 몸에서 나가야겠어.”

 

영상이 실제를 모방하고 재현하는 대신, 영상과 실제의 안과 바깥 또는 앞뒤가 뒤집혀 실제가 영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형국. 이런 상황에서 장서영은 작업을 해오는 내내 타인이 특정해낼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한다. 영상 매체에 관한 이 글의 모든 분석을 뒤집어 자전적 이야기로 환원해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빛의 피부를 만지는 일의 멜랑콜리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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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_미술비평가

동시대미술의 수행적 측면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2015년 동시대 퍼포먼스 미술에 관한 글로 제 1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고, 극장성의 번역에 관한 기획으로 AYAF 시각예술 큐레이터에 선정되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2016), 《박정혜 개인전: Dear. Drops》(2016), 《연말연시》(2015), 《산책일지》(2014, 공동) 등을 기획했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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