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영의 세계에 다녀와서
안소현(독립 큐레이터)
그 세계는 말로 설명해서는 잘 모르고 일단 몸으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래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와는 너무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죠. 수학에서 비유클리드 공간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그 동안 유클리드 공간에서 불변의 규칙이라 믿었던 것들을 버려야 하지요? 바로 그런 세계입니다. 하지만 장서영의 세계가 이미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변하고 있고, 규칙들은 언제 깨질 지 모릅니다. 우리는 잠시 그 세계에 들어가 관찰할 뿐이지요. 아마 당신이 그곳에 갔을 때는 제가 본 것과는 다른 규칙의 세계를 보고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참 희한하게도, 그 세계가 마냥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세계에는 뾰족한 발을 가진 신체가 많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괴물인지 잘 모르겠어서 일단 신체라고 부르겠습니다. 신기하게도 발꿈치를 땅에 대지 않고 발끝으로 잘도 걸어다니더군요. 그것은 다리만 보면 멀쩡한 사람 같긴 합니다. 하지만 위를 보면 대개 머리가 없습니다. 아니 머리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붕대로 꽁꽁 감싸여 있거나 정신이상자처럼 구속복(strait jacket)에 갇혀 있어(<걸음마>)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종이처럼 얇은 몸을 가진 짐승도 돌아다닙니다(<집짐승>). 공통점은 움직임이 매우 가볍고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우리 세계의 발레를 떠올리면 됩니다. 제가 보기에 그 세계의 중력은 적어도 우리 세계보다는 약한 것 같습니다. 대신 우리의 지표면 어디에나 중력이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세계에는 모든 공간에 회전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신체들은 대체로 쉬지 않고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바닥에 누워있는 것에 익숙하듯 그들은 회전하는 것에 익숙한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한쪽 발을 축으로 계속해서 ‘턴’을 하는 신체도 있었고(<피루엣>), 구속복을 입고 얼굴을 붕대로 감은 채 토슈즈를 신고 위태롭게 한 자리에서 걷고 또 걷는 신체도 있었습니다(<걸음마>). 또 다른 신체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의 위쪽 끝은 천정의 한 점에 고정되어 전체적으로 긴 원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신체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멈추지 않겠느냐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신체는 모니터 영상 안에 갇혀 있었는데, 그 영상은 루프로 재생되어 무한 반복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그 영상에는 또 다른 영상이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신체와 꼭 닮은 원뿔 형태가 회전하는 그래픽 애니메이션이 역시 무한반복되고 있었습니다(<이름 없는 병>).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그래픽, 실사영상, 현실세계를 구분하고 있는지는. 그들은 분명 갇혀 있었지만, 흥미로운 것은 어차피 어딜 가도 돌고 돈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심지어 어떤 신체는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스트릿뷰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절실히 벗어날 생각은 없다고 했습니다(<납작한 세계의 구체>). 그들도 죽지 않냐구요? 그 세계의 신체들은 윤회를 믿고 있었습니다. 2년전, 그러니까 우리 세계의 시간으로 2015년 초에 “영원히 반복해서 익사하는 곰”을 처음으로 만났더랬습니다. 곰은 유치원 선생님처럼 과장된 동작을 곁들여 자신이 노아의 방주 시절부터 익사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기억을 부분적으로 지우고 리셋 하는지,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했습니다. 그의 생이 반복되는 것인지, 기억이 지워지기 때문에 반복처럼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어린 아이들에게나 하는 유치한 거짓말인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듣다보니 어쩐지 윤회라는 것이 정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체들만이 아닙니다. 사물들도 천성적으로 반복에 익숙한 것 같았습니다(그 세계에서 유기체와 비유기체가 구분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일단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사물”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천정에 길게 매달린 전등은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절뚝거리는 진자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Swing Lamp>). 흔들의자의 다리처럼 생긴 나무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깁스를 해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같은 동작을 단순반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권태>). 어쩐지 안쓰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붕대를 풀어주면 기지개를 몇 번 켜고 막 움직일 것만 같았습니다.
장서영의 세계에는 크고 하얗고 둥근 머리를 가진 신체들이 많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중력이 약하기 때문에 머리가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곰이나 토끼 같은 동물탈을 쓴 것처럼 보이는 데다, 다양한 동작들을 능숙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매우 좋아할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얗고 둥근 것이 머리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납작한 세계의 구체> 속 화자는 어느 날 머리 부분이 하얗고 납작한 동그라미가 되었다며 “이 납작한 머리로는 입체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답니다”라고 말하다가도, “하얀 원이 생긴 것인지 머리가 없어진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했습니다. 맞아요. 하얀 머리는 없어진 머리일 수도 있어요. <나를 잊지 마세요>에서는 역사에 자신을 각인하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인물들, 왜 그 정치인이나 유명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의 얼굴에 동그란 하얀 빛이 비쳐서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마저 노랫소리에 묻혀 버렸지요. 영상 이미지에 빛을 쏘면 이미지가 없어지고 다른 소리가 커지면 원래 소리가 안들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구요? 글쎄요. 전 머리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커다랗고 부드러운 하얀 애드벌룬 같은 것을 자꾸 마주치게 되는데, 머리 없이 발레를 하는 신체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아까 그 하얀 것이 잃어버린 머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블랙홀 바디>).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과 실재가 사라지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나요? 어차피 사라짐이라는 건 안보이게 되는 것 아닌가요? 아, 당신과 그 부분에 대해 길게 논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세계는 대부분 흑백이었습니다. 흰 색과 검은 색은 오로지 존재감의 정도에 따라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지요. 네, 빛과 그림자. 하얗고 둥근 원이 사라짐이라면, 검고 복슬복슬하고 형태를 설명하기 힘든 신체는 나타남이었습니다. 흰 바탕 위의 검은 글씨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즉시 지워져 버렸습니다. 신체들은 사라짐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에 저항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어두운 건물의 실내를 헤집고 들어가며 마이크에 대고 “엄마, 아빠, 이걸 들으실 때면 저는 거기 없을 거에요. 사랑해요. 한번도 말한 적 없지만 정말이에요.”라는 말을 반복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녀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빵을 뜯어 바닥에 표시를 하고 있었습니다(<By the time you hear this, I will be no longer there>). 그녀는 ‘쿨하게’ 사라짐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장서영의 세계의 신체들은 통증에 예민했지만, 그 통증의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들은 죽고, 사라지고, 기관의 한 부분이 없어지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자꾸만 통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통증이야말로 그 신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신호이자 동시에 아직 신체가 죽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가장 명징한 신호가 아닐까요? “통증 없이는 존재감도 없는 내장”(<블랙홀 바디>)은 그래서 좀 서글펐습니다. ‘사라져 가고 있음’과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천천히 빙글빙글 도는 안팎이 뒤집힌 양말 한 짝에는 <아주 중요한 내장을 위한 기념비>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기이한 세계를 여행한 소감이요? 글쎄요. 신체의 끝없는 반복동작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우리 세계의 법칙과 너무 달라서 괴로웠냐구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장서영 세계에서는 당연한 가치들의 위계와 구분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크고 두껍고 무겁고 확실하고 중요한 것들은 작고 얇고 가볍고 불분명하고 사소한 것들과 뒤섞여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 불리는 머리가 없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죠. 머리 없는 신체가 계속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어요. 그 세계에서 신체의 운동에 가장 중요한 기관은 뼈와 근육보다는 검고 부들부들한 털 같았어요. 신체의 주요한 기능들은 다른 기관에 배치되어 있었고, 얇고 흐느적거리는 가짜들은 두껍고 단단한 진짜들을 대체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거기엔 분명 기시감이 있었어요. 누구나 한 번쯤 겪지 않나요? 불확실이 확실로 뒤바뀌는 순간을.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은 별 것 아니라고 하고(<블랙홀 바디>), 운명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이름만 바꿔도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고 하죠(<어둡고 공허한>, <완전한 인간>). 거기서 레아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어쩌면 제가 만난 사람이 레아였을 수도 있는데, 그건 확실치 않아요. 어쨌거나 사람들은 레아가 SNS에 남긴 말들은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녀가 남긴 말로 그녀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레아는 누구인가?>). 레아와 인상착의가 거의 같은 여성은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레아를 공상허언증 환자라고 진단함으로써 우리를 거짓말쟁이 크레타인의 역설에 빠져들게 만들었어요. 우리가 중력처럼 당연하고 절대적으로 여기는 주어진 가치들은 사실 섬세하게 적용되지 않지요. 크고 중요한 것일수록 작고 사소한 것들을 함부로 밀어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장서영의 세계에서는 위계와 구분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 그들은 모두 나타남과 사라짐, 있음과 없음, 0부터 1사이의 좌표 위에 평등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것은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이내 다른 것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신체를 버릴 수 있으며, 내장은 밖으로 나와 뒤집힐 수 있지요. 그렇게 위계와 가치체계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리듬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괴물도, 내장도, 사물도, 글자도 베르디의 오페라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블랙홀 바디>). 그것들은 모두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과 체념을 동시에 갖고 있고, 회전과 반복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리듬이야말로 먼지부터 지구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 공평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조각, 설치, 텍스트, 영상의 형태로 등장하는 수많은 몸들이 모두 흑백의 한 목소리로 사라짐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짙은 허무로 향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서영의 기이한 세계는 회전목마를 타고 바라본 풍경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반복적인 음악, 회전과 오르내림, 불빛 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들 속에서 정해진 답의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이상한 감각과 정서들을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세계에서 그토록 내리기 싫었던 건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가고 싶습니다.
2016